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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앤드루 포터 소설, 김이선 옮김) 리뷰독서 기록 2021. 3. 9. 18:06300x250
안녕하세요.
오늘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는 책에 대해 리뷰를 하고자 합니다.
작가님은 앤드루 포터, 옮긴 분은 김이선입니다.
먼저 책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말하자면
얇고 낮은 온도의, 쇠로 된 난간이 연상되었어요. 끓어오른다기보단 저온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겠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까지 묘사해내
얇고 가늘게 얽힌 신경다발 같은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진득거리지는 않아요.
섬세하면서도 담백한 감정 묘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분명 마음에 꼭 드실 소설이에요.
이제 각각의 단편들의 줄거리와 인상 깊었던 구절들에 대해서 얘기를 할 예정이니
스포를 피하고 싶으신 분들은 주의해 주세요!
첫 번째 단편인 구멍은 죄책감을 다룬 이야기예요.
어린 시절 화자와 친구인 탈은 함께 놀러 나갔다가 탈이 깊은 구멍 속에 빠져 돌아오지 못하고 맙니다.
화자가 탈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음에도 화자는 자신이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꿈을 꾸게 됩니다. 화자의 죄책감이 드러나는 부분이에요. 화자는 잔디 봉지를 내가 들었더라면, 내가 떨어드렸더라면, 떨어뜨린 탈에게 그냥 두라고 말했더라면,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렸더라면, 등등의 무수한 가정을 하며 후회를 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마음을 털어놓지 않음으로써 죄책감을 덜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요. 그 점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p. 15
그러나 나는 내 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탈은 살게 되는 그 부분은.
아술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한 부부가 대신 교환학생을 집으로 들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그들 부부는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된 일로 인해 각자 많이 지쳐있어요. 하지만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고 두리뭉실 넘어가면서 관계의 틈이 점점 벌어집니다. 그리고 아내인 캐런은 교환학생인 아술에게 엄마 역할을 하지만 그럴수록 상처는 더 곪아갑니다. '기분 전환'을 위한 아이일 뿐이고 아술 또한 그걸 알아서 적당히 살갑게 대하지만 진심은 아니어 보여요. 캐런의 남편인 폴은 화자대로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갖고 있고 자기 비하적인 면을 보입니다. 아술이 오고 나서 자신은 겉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p. 72
그녀를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는 그녀가 자기 자신의 삶에 너무나 낙담하고, 지치고, 모든 환상이 깨진 나머지, 다른 누구에게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부는 아술에게 집에서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여는 것을 허락하고 아술과 친구들은 술을 마시며 놉니다. 그리고 폴은 화장실에서 대마초를 하고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요. 그렇지만 이미 의식은 몽롱한 상태이죠. 파티는 계속되고 아술은 폴의 초대로 집에 오게 된 라몬에 의해 머리를 다치게 됩니다. 구조대원이 오고 떠날 시간이 되자 폴과 캐런은 서로를 잠시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그제야 지난 행동의 잘못을 돌아보게 되죠.
이 이야기는 다음 단편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의미와도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단편의 주제는 사실 책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p. 125
다른 사람이 당신을 채워줄 수 있다거나 당신을 구원해줄 수 있다고-이 두 가지가 사실상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추정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이 구절을 읽고 너무 슬펐어요. 이 부분에서 전 작가는 삶은 오직 자기 자신만의 싸움으로 생각한다고 느꼈습니다.
어쨌든 부부는 작가에 의하면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었지요. 아술로 인해 자신들의 허전함이 채워지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요.
그리고 또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삶을 버텨내는 사람의 이야기는 코네티컷에서 나옵니다. 화자인 스티븐의 어머니는 이웃집의 벤틀리 부인을 사랑하고 데이트도 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화자이자 아들인 스티븐이 보게 돼요. 벤틀리 부인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 남편에게 알려졌는지, 그 사실을 스스로 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알게 되어 다른 나라로 떠나게 됩니다. 벤틀리 부인이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러 다녀간 저녁, 어머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맙니다. 그리고 스티븐에게 올라가라 말해요. 스티븐은 어머니에게 다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추스르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p, 277
그렇지만 나는, 그 저녁, 벤틀리 부인이 떠난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가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의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오지 않을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날 구원해주러 오지 않을까 하는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갖고 있는 뒷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 외롭고 아픈 뒷모습이기도 하죠.
희망과 관련해서는 머킨이라는 단편의 문장과 연결 지어 생각해보고 싶어요.
p. 183
어찌 보면 그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귀가 다 안 들리던 아이들, 자기들의 청력이 언젠가 회복될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어본 적 없는 아이들보다 가르치기가 더 힘겹다. 그러나 이런 모습, 자기들이 읽는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나마 입 밖으로 내어보려고 무던히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진다.
작가는 덧없는 희망이라고 표현했지만 바로 이 희망이 그 아이들을 견디게 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 희망이 코네티켓의 어머니나 아술의 부부와 다른 점은 이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헤쳐나가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쓰다 보니 작가는 본래 자기가 가진 회복력을 믿는 것 같아요. 언젠가 단편들 속의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마음속 수렁에서 걸어 나오는 이야기를 이어 보고 싶네요.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단편 제목은 폭풍이에요. 화자인 앨릭스의 누나는 예비 남편인 리처드와 여행을 갔는데 남자가 누나를 여행지에 홀로 두고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자신이 남자를 버렸다고 얘기하지만 얼마 후 리처드에게서 용서해달라는 전화를 받고 동생에게만은 진실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누나는 리처드와 결혼을 할 생각임을 말하며 동생에게 기댑니다.
p.245
잠시 나는, 어린 시절 그곳에 앉아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지난날의 늦여름 오후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언덕 아래로 아버지의 자동차 전조등 불빛이 보일 때 누나가 미소 짓던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기쁨처럼 보였다. 그 불빛, 자동차,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안다는 그것은.
자신을 떠났던 사람이라도 돌아온다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는 점이 슬펐던 부분이에요. 오래 누군가를 기다려온 사람의 외로움이란 너무 큰 것 같아요. 누나가 부디 리처드에게만 의존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인드맵처럼 떠오르는 키워드대로 적어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리뷰였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책을 다시 읽어보니 이 작가는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를 존중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등장인물의 감정도 소홀히 하지 않고 면밀히 관찰한 끝에 쓴 결과 같았어요. 그리고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지만 머킨의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삶에 대한 희망을 이어나갈 수 있단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에게 구원받을 수 없다는 문장을 읽고 많은 고민을 했었는데요. 타인으로 인한 완전한 구원은 어렵지만 역시 사람은 다른 무언가나 누군가의 도움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머킨의 아이들도 발표회를 통해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힘을 내니까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겠지요.
그럼 다음에 또 다른 리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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